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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 부부 | 순교일 1868. 9. 28(양)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박경진 프란치스코 : 1834 ~ 1868. 9. 28(양), 충청도 청주 출신

오 마르가리타 : 1836 ~ 1868. 9. 28(양), 해주 오씨

"핍박을 피해 고향을 떠나 깊은 산골로"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고향에서 외교인들로부터 천주교인으로 알려지게 되어 박해와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어렵게 되자 천주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우촌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기로 다짐합니다.
  부모님과 박 프란치스코의 아우 필립보, 맏아들 안토니오와 세 아들이 모인 가운데, 고향 땅에서 지속적인 신앙을 실천할 수 없으니, 힘이 들더라도 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우촌으로 가서 살자고 제안합니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심하니 고향을 떠나 조용한 산골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마음 편히 신앙생활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자, 부모와 아우, 맏아들 모두가 찬성합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을 먹고 살림도구를 챙긴 후, 교우촌이 형성 된 깊은 산골로 가기 위해 먼 길을 재촉합니다. 청주에서 진천 절골 까지 100여리나 되는 먼 길을  어린 막내를 오 마르가리타는 등에 업고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진천 절골로 향합니다. 진천 절골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아주 깊은 산골입니다. 
  진천 절골은 탄압과 박해를 피해 지방에서 모여든 천주교인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협소한 계곡을 따라 도착한 절골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가족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에 안성맞춤 이였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없자 가족 모두는 화전을 일구어 조, 콩, 수수 등을 심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합니다. 그래도 일가족 모두는 신앙 속에서 행복한 나날을 지냅니다. 
  계속되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핍박을 피할 수 있기에 이곳은 신앙생활 하기에는 천국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뜸했던 탄압과 박해가, 해가 바뀌고 1866년 병인년 봄이 되자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나날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이 곳 오지에도 포교들이 닥칠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신분이 들어나지 않도록 움직였습니다. 다행히 첫 박해 때는 포교들의 발길이 이 곳 까지는 닿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또 다시 시작된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

그렇게 2년여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나라에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868년 무진년에 독일 출신 오페르트(E.J.Oppert)일행이 충청도 덕산에 있는 홍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만 일명 ‘덕산 굴총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더 심해졌습니다.
전국의 관아 포교들과 밀고자들은 천주교인들을 잡으려고 밤낮으로 혈안이 되었습니다. 특히, 죽산도호부의
포교들이 더 심했습니다.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울창한 숲이 옷을 갈아입는 가을이 오고 있었습니다. 
  19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 경기도 죽산관아의 포교들과 밀고자들이 교우들이 있음직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진천 절골 깊은 산속까지 오게 됩니다. 포교들의 동정을 살피던 박 프란치스코는 급히 가족들에게 모두 피신할 것을 알림니다. 가족들은 살림살이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부랴부랴 산속으로 도망을 갑니다. 하지만 너무나 깊은 산골이다 보니 길을 잃고 가족들 모두가 뿔뿔이 헤어집니다. 아직 간난 아이인 막내를 업고 무작정 산 속으로 도망친 오 마르가리타는 지쳐서 숲속에 숨어 있다가 포교들에게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무수한 매질을 당합니다. 하지만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이 행여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품안에 품고 매질을 이겨 냅니다. 어린 자식이 엄마 품에서 울어도 포교들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매질을 한 후에 어린아이와 함께 포교들이 머물고 있는 주막까지 끌고 갑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박프란치스코는 포교들이 보이지 않자 가족들을 찾아 숲 속을 헤매다, 가족을 찾지 못하고 망연자실 합니다. 가족 모두가 붙잡혔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산 아래로 내려 옵니다. 산 아래로 내려 온 박 프란치스코는 날이 너무 어두워서 다음날 일찍 찾기로 하고, 하룻밤 지낼 곳을 찾아갑니다.
아래 동네로 내려온 박 프란치스코는 어느 집 앞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도록 청합니다.
“위 절골에 사는 박치수라는 사람입니다. 사정이 생겨 그러하니 오늘밤 하루만 지낼 수 있습니까?”하자
외교인인 신철숙은 포교들이 천주교인들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늘밤 이 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 동정을 살피는 것이 좋겠소.”하고 
박 프란치스코를 안심시켜 집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박 프란치스코는 신철수의 말에 너무 고마워서 아무런 의심없이 방안으로 들어가, 산 속을 헤매면서 쌓인 피로로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신철숙은 박 프란치스코가 깊은 잠에 들자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와 포교들이 머물고 있는 주막으로 달려가, “우리집에 천주교인 박치수가 찾아와 지금 깊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하고  포교들에게 말하자, 
포교들은 신철숙의 집으로 달려가서 박 프란피스코를 포박합니다.

"나의 자취를 따라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자"

다음날 아침, 포교들은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를 죽산관아로 끌고 가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오 마르가리타는 막내 아이를 주막에 남겨놓고 끌려가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주막 주인에게,
“아직 다른 자식들이 잡히지 않았으니 자식들이 찾아오면 이 어린 아이를 잘 보살펴 주라.”고  부탁하고 길을 떠납니다. 잡히지 않은 아우 필립보와 장남 안토니오는 먼 발치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박 프란치스코와 그의아내 오 마르가리타는 먼 길을 걸어 죽산관아로 끌려 갑니다. 갖가지 문초와 형벌, “배교하라.”는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마침내는 형리도 이들 부부에게 더 이상의 문초와 형벌을 가하지 않고, 이들 부부의 청원을 들어 주었습니다. 
“나에게 아우와 장남이 있소. 이제 곧 형장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할 터, 소식이나 전해주었으면 좋겠소.”하니 형리는 붓과 먹, 종이를 박 프란치스코에게 주면서, “소식은 전해주리다.”하자 박 프란치스코는 아우 필립보와 장남 안토니오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부부는 주님을 위해 치명할 것이니, 네가 혹 잡혀서 죽지 않는다면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고, 부모께 효도하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다가 하느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자취를 따라 천국에서 영원히 만나자."
이 글이 형리를 통해 전해지자 또 다시 형벌이 가해졌지만, 부부는 끝까지 주님을 섬겼습니다.
1968년 9월 5일(음력 7월 19일) 체포되어 23일 만인 19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부부가 함께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박노학(베네딕도)신부(2003년 선종)의 증언

박프란치스코가 저의 증조부님이 되십니다. 족보에는 밀양박씨 규정공파 21세손이며, 이름은 경진, 자는 치명, 1834년생이며, 오 마르가리타는 해주 오씨, 1836년생이고, 묘는 합장으로 안성군 죽산면 가치암(가치라(래)미 : 현 안성 천주교 묘지 부근)입니다.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 부부 | 순교일 1868. 7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

최제근 안드레아 ; 1848 ~ 1868. 7, 강릉 최씨 경상도 출신

방 데레사 ; 1850 ~ 1868. 7, 경기도 용인 출신

"순교자 아들과 며느리"

1968년 7월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되는 안타까운 일이 죽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단지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이들 부부는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을 위해 순순히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는 부부가 그들입니다. 2년 전인 1866년 병인년에 아버지 최종여 라자로와 큰아버지 최천여 베드로(공주에서 순교)를 잃었습니다. 
  최제근 안드레아의 아내인 방 데레사는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자 부인 이였습니다. 경기도 용인 사람으로 본성이 순하고 착했습니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일찍이 영세하여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최제근 안드레아는 아버지와 큰아버지 식구를 따라 경상도에서 목천 소학골로, 핍박과 박해로부터 벗어나 천주교인들이 모여 있는 이곳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방 데레사와 혼인하여 살던 중, 1866년 병인년에 시아버지가 치명하자 남편인 최제근 안드레아는 또 다시 박해를 피해 외교인의 집을 전전하며 일하고 있었고, 방 데레사는 남편의 뒷바라지와 함께 신앙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신알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자식을 버리다"

열심히 신앙심 속에 살던 이들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라고 시련이 닥쳐옵니다. 1868년 4월 죽산 포교에게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방 데레사는 어린 아이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잡혀 죽산관아로 끌려가면, “어린 아이는 어찌되나”하는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방 데레사는 남편 최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육정(인간의 감정)에 의하지 말고 어린 자식을 떼어놓고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 갑시다.”
남편 최 안드레아는 방 데레사의 말에, 
“아직 어머니의 젖을 먹어야 하는 아이를 두고 간다니...” “내가 잘못 들은건가.”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합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부인이 말한 뜻을 알고 순교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참으로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결정을 한 방 데레사는, 모성애를 초월한 신앙심이 참으로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비정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인간적인 감정을 버리고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거룩한 결정을 하는 순간이였습니다.

"옥중서신"

부부가 함께 죽산관아로 끌려가 온갖 혹형에도 주님을 위해 참아내고 있었습니다. 남편 최 안드레아가 혹독한 형벌에 못이겨 마음이 흔들릴 때는 방 데레사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기회에 주님을 위해 형벌을 참아내고, 형벌 아래 죽으면 치명이거늘, 배교하지 말고 주님의 뜻에 따라 순명합시다.”하며, 함께 순교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온갖 형벌을 참아내며 옥중에서 보내다가 아우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으나 곧 주님을 위하여 죽을 터이니, 너희들은 부디 주님이 명하신 대로 살다가 혹 살아나거든 열심히 수계하며 본분을 잊지 말고 서로 우애하고 화목을 잃지 말라. 죽은 후 천국에서 반가이 만나자."
이들 부부는 나라의 명이 엄격하여  7월에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로보시나 | 부부 | 순교일 1868. 7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보로시나 부부

조치명 타대오 ; 1838 ~ 1868. 7, 경기 광주 출신

김 우보로시나 ; 1841 ~ 1868. 7, 출신

"귀머거리 남편"

조치명 타대오는 경기도 광주(천호동)양반의 자손입니다. 일찍이 김 우보로시나와 혼인하여 죽산 용천에서 교우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며 살고 있었습니다.
1866년 병인년 박해가 시작되어 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곧바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탈출에 성공한 조 타대오는 아내와 함께 조용히 2년여를 신앙심을 키우며 지내고 있다가, 1868년(무진년) 7월에 죽산 포교에게 다시 잡혔을 때는 부부가 함께였습니다.
조치명 타대오가 다시 잡혔을 때, 귀머거리임을 안 포교들은 조 타대오 대신 아내인 김 우보로시나를 잡아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포교들은 “이참에 둘 다 잡아가자.”며 부부를 함께 죽산관아로 끌고 갑니다.  죽산관아 형리는 귀머거리 조 타대오에게
“당과 친척을 대라?”며 무수히 매질을 합니다. 
하지만 조 타대오는 형리의 말을 들을 수가 없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형리는 더욱 더 매질을 합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내 김 우보로시나는 형리에게 말하길, 
“귀 막힌 사람에게 그 모양을 하면 좋을 것이 있느냐?”하니, 
형리는 그제서야 매질을 멈추었습니다. 
김 우보로시나는 남편에게“천주를 위해 함께 죽자.”며 수화로 말합니다. 
조 타대오는 아내의 두 손을 꼭 잡고 천주께 순명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옥중에서 같이 붙잡혀 온 교우들에게 “함께 천주께로 가자”며 위로와 격려를 하면서 힘이 되곤 하였습니다.

"빌어온 밥을 나누다"

조 타대오 부부에게는 열 한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옥중의 부모님이 행여 굶기나 할까? 하여 이집 저집 다니며 동냥한 밥을 매일 부모님께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빌어 온 밥을 모친 김 우보로시나는 함께 갇힌 신자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빌어 온 밥이 적을 때는 먼저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굶기도 했습니다. 
조 타대오 부부는 죽음이 곧 닥쳐 온다는 것을 느끼고, 아들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곧 죽을 것이니, 너는 부모를 생각지 말고, 살던 곳으로 가라." 하였습니다.
아들은 부모의 말대로 살다가 부모를 뵙기 위해 관아를 찾아갔으나, 이미 교수형에 처해 치명하였습니다. 조치명 타대오의 나이 32세였고, 김 우보로시나는 27세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증언"

서울교구의 조창희 신부님이 조치명 타대오의 증손자임을 확인하고, 조 타대오의 형 조덕상 시몬은 1866년(병인년)에 두 번 잡혔다가 두 번 도망하여 목천 칠안면 공심이에 살고 있었으나, 1870년(경오년) 2월 23일 다시 경포와 본읍 포차에게 잡혔다.
포졸이 묻되, “너 천주학을 하느냐?”하자, “하노라.”하고 본관으로 들어가 첫 추열에 죽기를 다짐하니, 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 서울로 보냈다. 
관령에 따라 온양읍에 들려 그 고을에 갇힌 여러 신자들과 함께 서울로 가서 치명하였다.

여기중, 여정문, 여정문 아내와 아들 | 일가족 | 순교일 1866(여기중), 1867

여기중, 여정문과 아내, 여정문의 장남 일가족

여기중 ; 1806 ~ 1866, 충청도 내포 출신

여정문 ; 1827 ~ 1867, 충청도 내포 출신

아내 ; ? ~ 1867, 출신

아들 ; 1852 ~ 1867, 충청도 내포 출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여기중은 충청도 내포 사람으로 소년 시절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고향에서 살면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외교인들 사이에서 섞여 신앙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또한,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계율을 지키기에 어려움이 생기자 교우들이 모여있는 깊은 산골로 가족들을 이끌고 이사해서 농사를 지으며 신앙을 실천하며 생활 하였습니다.
  1866년(병인년)에 깊은 산골까지 찾아온 죽산 포교에게 잡혀 온갖 형벌을 당합니다.
형리는 여기중에게 “숨겨논 재물과 신자를 대라.”며 혹독한 온갖 형벌을 가합니다.
하지만, 여기중은 형리에게 일절 입을 열지 않고, 신자들이 숨은 곳도 대지 않았습니다. 
잡혀 간지 얼마 되지 않아 교수형으로 치명하였습니다. 나이는 60여세였습니다.

"장부와 함께 죽겠다."

여정문은 여기중의 아들입니다. 1866년(병인년)에 부친이 죽산관아 포교에게 체포되어 치명하자, 다른 동네로 피신하여 이사를 갑니다. 
  이사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시련이 닥쳐옵니다. 
  다음해인 1867년에 죽산 포교들에게 발각되어 잡히게 되었습니다. 
죽산 포교들은 여정문을 포박하여 끌고 가려 하자,   
여정문의 아내는 포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장부와 한 가지로 죽겠다.”“나도 천주교인이니 함께 잡아가라.”
남편 여정문과 함께 잡혀가길 원했습니다. 포교들은 이 말을 듣고 여정문의 아내도 같이 포박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15세 된 아들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이제 장가들어 세상 육정에 내외 이별함이 심히 박하되, 부보 두 분이 잡혀감을 보고 있을 수 없다. 나도 같은 교인이니 부모와 함께 가겠다.”며 자원하여 잡혀갔습니다.
포교들은 가족 모두를 포박하여 죽산관아로 끌고 갑니다.

"가족 모두가 한 날, 한 시에 하느님 품으로"

옥사에 가족이 함께 있으면서 서로 위안을 합니다.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끗끗하게 신앙을 지켜냅니다. 이렇게 부보, 자식 셋이 함께 죽산으로 가서 치명 대사를 서로 권면하며 지냈습니다. 
  당시 국법으로는 아무리 악독한 죄인 일지라도 일가족을 한 날, 한 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종족보존을 위해 부자를 같이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해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이 법이 무시되고, 부자를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이는 일까지 자행되어
일가족 모두가 한 날, 한 시에 모두 처형되는 안타까운 일이 죽산에서 있었습니다.
여정문과 아내, 아들, 일가족은 교수형으로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영광스런 순교를 하였습니다.

최성첨과 아들 | 부자 | 순교일 1868. 8. 13

최성첨과 아들

최성첨 ; ~ 1868. 8. 13 충청도 내포 출신

최 ; 1839 ~ 1868. 8. 13 충청도 내포 출신

"부자가 함께 순교"

최성첨은 충청도 내포 사람으로 구교우 집안입니다. 고향 내포도 박해가 심하여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고향을 떠나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살기 시작 합니다.
하지만 박해로 인하여 정착하여 생활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안성 성남으로 이주해 살았을 때도 병인년 박해로 인하여 또다시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보다 외교인이 많은 지방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교인들이 있음직한 곳은 관아의 포교들이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입니다.  
1868년(무진년) 8월, 박해를 피해 외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외교인들의 밀고로 죽산 포교에게 아들과 함께 잡혀 죽산관아로 끌려갑니다.
이들 부자에게도 국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를 한 날, 한 시에 죽이지 않는, 국법이 금하고 있는데도 법을 무시하고, 그 해 8월 13일 아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 하였습니다.
최성첨은 아들 삼형제가 있었습니다. 장남 최  , 차남 최 요한, 3남 최 요안입니다. 병인박해 때 차남 최 요한은 3남과 함께 천안 만복동으로 피신하여 살고 있다가 1878년 공주 포교에게 체포돼 4월 10일 아우 최 요안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이 두 형제의 순교 사실을 증언한 사람이 목천 서덜골에 사는 차남 최 요한의 4촌 최원심 회장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적한 결과 최제근 안드레아와 한 집안으로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사는 최병기 시몬이 그 후손입니다.

유 베드로 | 순교일 1869. 8

유 베드로

유 베드로 ; 1846 ~ 1869, 8 충청도 제천 출신

"오랜 지기가 포교"

유 베드로는 구교우의 후예였습니다. 
  수계하기 좋은 곳만 찾아다니다가 충청도 제천 번자리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 때 병인박해로 인하여 천주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제천 번자리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우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강원도 강릉 영서 계곡 깊은 산골로 피신을 합니다. dl 곳 역시 안전하지 못하여  다시 평창 조은으로 이사를 합니다. 박해를 피해 이 곳, 저 곳, 가족이 여러 번 옮겨 다닙니다. 
  평창 조은에서 살 때 같은 신자 황 요한을 만나, 두 집이 서로 재성권면하며 열심히 주를 받들어 섬기고, 그 부모와 3형제가 신앙을 지키며 화목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김석여라는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유 베드로를 찾아 왔습니다. 
1869년 8월 그믐, 이른 아침 이였습니다. 뜻밖의 인물인 김석여의 방문에 유 베드로는 반갑게 맞이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먼길을 찾아주시니 정말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지나온 세월이야기를 하자, 식구들도 오랜 지기인 줄 여기고 아침밥을 부지런히 준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상을 차리기 위하여 방에 들어서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절친한 사람인줄 알았던 김석여가 돌변하여 유 베드로를 눕혀놓고 포박하고 있었습니다. 놀란 가족들은 그만 자리에 털석 주저 앉아 멍하니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포교였습니다.
죽산도호부 포교들이 멀리 관할도 아닌 평창 조은까지 와서 천주교인들을 잡는데는 막강한 군사력 동원에 있었습니다.   
유 베드로는 별 다른 저항없이 체포되어 죽산으로 끌려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증언기록 : 유 (兪 ; 점점 유)로 기록 되어 있다.

정덕구 야고보 | 순교일 1867. 12

정덕구 야고보

정덕구 야고보 ; 1845 ~ 1867. 12 경기도 용인 출신

"심한 형벌로 옥사하다"

정덕구 야고보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용인 더덕골입니다. 
  후에 용인 삼배울 점촌 사기 굽는 마을로 삼촌 정여삼과 조모, 동생, 온 가족이 이사하여 신앙을 실천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 천주교인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포교들이 널뛰고 다닐 때 였습니다.
  1866년 10월 20일 저녁상을 물리고 온 가족이 모여 주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영세를 예비하고 있었던 이 서방(이화실)도 함께하여, 찬양기도는 더 큰소리로 울려 퍼졌습니다. 
그때 였습니다. 방 문이 부서질 정도로 크게 열리더니 광주 포교 세 패가 들이닥쳤습니다. 방 안에 있던 야고보와 가족, 이화실은 도망도 못가고 꼼짝없이 모두 잡혔습니다.
  포교들은 정덕구 야고보와 이화실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두 사람의 다리를 함께 맞대어서 쇠고랑을 채우고, 손도 고랑을 채우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두들겨 팼는지 두 사람 모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잃은 두 사람을 보고는 포졸들은 술을 마시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삼촌 정여삼은 포교들이 술에 취해 잠이 들자 정 야고보와 이화실이 묶여 있는 방으로 조심스레 다가갑니다. 
포교들이 잠이 깰까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리며 불러봅니다.“덕구야! 이 서방!”
아무런 기척도 없자 조용히 방문을 열어 봅니다. 
혼절해 있는 두 사람을 깨워 쇠고랑을 푼 뒤, 삼촌 정여삼은 두 사람과 함께 도망을 쳤습니다.
  이 후, 이화실과 삼촌 정여삼은 얼마 되지 않아 먼저 잡혀 순교하였습니다.
정덕구 야고보는 용인서 멀리 떨어진 충청도 공주 국실로 도망하여 살다가, 충청도 공주 까지 내려 온 죽산 포교들에게 잡혀 온갖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1867년 12월 추운 겨울에 옥사, 순교하였습니다.

문 막달레나 | 순교일 1867

문 막달레나

문 막달레나 ; 1849 ~ 1867. 충청도 내포 출신

"남편을 먼저 하늘 나라로"

문 막달레나는 부모의 가르침을 잘 받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충청도 내포 사람 고 요셉과 일찍이 혼인하여 시부모를 효성으로 공경하며 농사도 열심히 지었습니다.
시부모와 남편 고 요셉을 따라 신앙의 꽃을 피우기 위해 내포에서 교우들이 모여 있는 목천 절골로 이주해 갑니다. 그 곳에서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 막달레나에게 시련이 닥쳐 왔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편 고 요셉이 체포되어 공주로 이송되어 갖가지 형벌과 “배주 하라.”하니, “배주 못한다.”하며 순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문 막달레나는 시부모와 함께 박해를 피해 또 다시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숨어 살았습니다.

"고 요셉이 아내에게 전하는 말"

고 요셉은 공주로 갈 때 아는 여신자를 만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주기를 부탁합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죽으러 가니 이제 세상에서는 다시 못 뵈울 것이니, 육정에 걸리는 생각을 버리고 잘 닦아 천주께 가서 만나지기를 바란다."
특히, 옥중에서는 함께 있는 신자들을 제성하며 열심히 권면하고, 한 달 후에 여러 신자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 하니, 24세 였습니다.

"핏덩이 자식을 버리고 순교"

어린 나이에 그것도 추운 겨울에 산에서 해산을 하였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해산 후 몸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행여 시부모님이 고생하실까, 어려운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님께 효를 다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산 포교에게 시부모와 함께 체포 됩니다.
문 막달레나는 죽산관아로 끌려 갈 때, 어린 핏덩이 자식을 도저히 인간의 감정으로는 버리고 갈 수 없는 일이지만, 신앙과 자식 사이에서 큰 고통과 갈등을 겪으면서 어린 자식을 놓아두고, 시아버지와 함께 순교의 길을 걷기 위해 죽산관아로 갔습니다. 
  문 막달레나와 시아버지 고 야고보를 배교 시키려고, 이간질도 해 보았으나 끝내 배교를 거부하자, 시아버지 고 야고보를 수원으로 이송 시키고, 문 막달레나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너의 시아비는 배교하여 집으로 돌려 보냈으니, 너도 이참에 배교하면 집으로 돌려 보내 주겠다.” 하자
문 막달레나는 시아버지가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설령, 시아버지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하더라도, 그 것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내, 잘 알고 있으니 나에게 거짓으로 말하지 말라.”며 “천주께로 나를 보내어 나의 지아비를 만나게 해 달라.”고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다, 끌려간 지 한 달 후에 다른 신자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문 막달레나의 시아버지 고 야고보는 충청도 내포사람으로 소년에 입교하였으며, 며느리와 함께 죽산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수원으로 이송되어 수원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한치수 프란치스코 | 순교일 1866

한치수 프란치스코

한치수 프란치스코 ; 1819 ~ 1866. 충청도 홍주 출신

"집안 식구 모두 체포"

한치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사람으로서, 경기도 양성 미리내로 이사하여 살고 있었으나 박해를 피해 죽산 용천에 가서 살다가 1866년(병인년) 1월에 집안 식구 아홉 사람이 함께 경포에게 잡혔다. 한치수 프란치스코는 죽산으로 끌려가서 옥사하였지만, 나머지 여덟 사람은 서울로 갔다가 풀려 나왔다.

김 도미니코와 김인원 | 순교일 1869. 10. 7

김 회장 도미니코, 김인원

김 회장 도미니코 ; ~ 1869. 10. 7 경기도 용인 출신

김인원 ; ~ 1869. 10. 7 경기도 안성 출신

"딸을 내 놓아라"

김 회장 도미니코는 경기도 용인 병목골에서 열 세 식구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병인년(1866년)에 시작한 천주교인들에 대한 추포령이 해를 넘겨도 계속되자, 김 도미니코는 식구를 데리고 산중으로 피신하여 여섯 달 동안 근근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웃 동네 외교인 10여 명이 모여 김 도미니코가 천주교인임을 알고 작당을 합니다.
김 도미니코에게 장성한 딸(17세)이 있다는 것을 알아 빼앗아 검탈 하려고 작당을 합니다. 이들은 김 도미니코의 집으로 쳐들어와 딸을 내 놓으라고 김 도미니코를 협박합니다. 
 “딸을 내 놓아라.”며 막무가내로 김 도미니코를 협박합니다.
이에 당황한 김 도미니코는 저들이 무슨 이유로 딸을 달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무리들에게,
“딸은 없소.”하자, 무리들은 김 도미니코의 말을 무시하고 집안으로 들어오려 합니다.
이를 지켜본 도미니코의 둘째아들 요한은 누이를 데리고 산으로 피신을 합니다.
  무리들은 도망치는 아들과 누이를 보고, 
“저기, 도망한다. 쫒아라.”
 얼마 못가서 무리들에게 포위당하자, 둘째 아들 요한은 누이를 뒤로 숨기고 무리들에게 소리칩니다. 
“만일 쫒아오면 이 돌로 쳐 죽이겠다.”하자, 
그들은 오히려 더욱 큰 소리로,
 “여자를 내 놓지 않으면 포교를 불러 너희 가족 모두를 몰살하리라.”며 협박을 합니다.
  김 도미니코는 나머지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 결국에는, 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며 떠나는 딸을 보면서 김 도미니코는 하염없이 자책하다가 목천 베장골로 이사를 갑니다.
이 곳에서 죽산 백해에서 온 김인원과 함께 1869년 10월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죽산으로 가서 1869년 10월 7일 김인원과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이희서, 홍천여, 이진오 | 순교일 1866. 12. 22(이희서, 홍천여), 1868(이진오)

이희서, 홍천여, 이진오(이희서의 사위)

이희서 ; 1818 ~ 1866. 12. 22 경기도 용인 출신

홍천여 ; ~ 1866. 12. 22

이진오 ; 1841 ~ 1868 경기도 시흥 출신

"이희서의 사위 이진오"

이희서는 경기도 양지 사기점에서 천주를 공경하며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살다가, 양지 한터로 이사를 합니다. 이웃집에는 같은 교우 홍천여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죽산 포교들은 이희서가 천주교인임을 알아내어 그를 체포합니다. 죽산 포교들은 이웃집 여인도 천주교인이란 것을 알아 여인도 체포를 합니다. 그 여인이 홍천여입니다.
  1866년 이른 봄에 불기 시작한 병인박해는 겨울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1866년(병인년)12월 22일 이희서와 홍천여는 한 날 처형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이진오는 이희서의 사위로 경기도 시흥 말미서에서 안산 방개울로 이사해 살다가, 1868년 남양과 죽산 두 고을 포교에게 잡혀 죽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홍치수, 정 토마스, 금 데레사 | 순교일 1871(홍), 1866(정), 금(?)

홍치수, 정 토마스, 금 데레사

홍치수 ; ~ 1871 충청도 청풍 출신

정 토마스 ; 1842 ~ 1866 경기도 용인 출신

금 데레사 ; ~ ? 경기도 용인 출신

홍치수는 충청도 청풍 쑥갓 사람으로 양근에 살다가 음성 사정리로 피신하였으나, 1871년에 죽산 포교에게 잡혀가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정 토마스에 관해서는 1968년 가톨릭대학교 교회사연구회에서 간행한 교회사연구지 제2집 죽산순교자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름 세례명 나이 거주지 순교년월일 참고문헌
도마 25 용인 1866 A1428
금 데레사도 정토마스와 마찬가지로 교회사연구회에서 간행한 교회사연구지 제2집 죽산순교자란에 이름이 기록돼 있을 뿐 어느 증언록에서도 순교 사적을 찾을 수 없다.
이름 세례명 나이 거주지 순교년월일 참고문헌
데레사 20 용인 ? A1086
참고문헌 A는 1938년에 정리 된 것 같다고 하나, 참고한 치명기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치명기 일부가 유실 된 것 아닌가 한다. 하지만 위의 표가 치명기의 기록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 확실한 만큼 죽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