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순교성지는 병인박해(1866)때, 수 많은 선조들이 피로써 믿음을 증거한 치명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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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 터" 로 불리게 된 순교터

죽산은 현재 행정구역상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다. 조선시대에는 도호부(都護府)에서 현(縣)으로 강등되기도 몇 차례 있었다. 조선시대 도호부(都護府)가 있을 때에는 그 면적이 상당히 넓어 지금의 안성시 일죽면, 죽산면, 삼죽면, 용인시 원삼면, 백암면 모두를 포함하고 충북 진천군 백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개정에 의해 죽산도호부에서 죽산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안성군으로 편입, 현재의 죽산면으로 개정되었다.
 죽산은 죽산 박씨, 죽산 한씨의 관향이기도 하며,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는 당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친, 유명한 시인 박인량(朴寅亮)의 고향이기도 하며,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는 송문주(宋文冑)장군이 죽주산성(竹州山成)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또 임진왜란 때는 망암(望菴)변이중(邊以中)이 화포(火砲)를 제작,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 후 병자호란 때는 삼학사의 한 명으로 중국 심양에 잡혀간 오달제(吳達濟)의 고향이요, 정조 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주국(李株國)장군이 태어난 충절의 고장,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특히, 고려 때 오랑캐(몽고)들이 진을 친 곳이라는 이진(夷陣)터가 있으며, 이 곳이 병인박해 때 처형지로 이용됐다. 지금의 성원목장 중심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지금은 목초들만 무성하지만 당시에는 큰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서 있었다고 한다. 잡혀 온 사람들은 죽산관아(현재 죽삼면사무소)감옥에서 이진터로 끌고 가 처형했다고 한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진터로 끌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여‘잊은 터’라고 불렸다고 한다.
  삼죽면에는 ‘두둘기’라는 삼거리가 있다. 이 곳에 주막이 있었는데 포졸들이 신자들을 잡아가지고 오다가 이 주막에 들려 술을 마시고 돈을 내라고 심하게 두들겨서 이 마을 이름이 ‘두둘기’라고 한다고도 전해진다. 또 달리 전하는 말로는 이 곳이 진흙길이라 신발에 많이 달라붙어 진흙을 털어내려고 신발을 두드려 두둘기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이처럼 병인박해로 인해 박해의 잔학상의 일면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앙 증거의 땅, 죽산순교성지"

죽산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스물 네 명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단 한 사람이 주님을 위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쳐도 우리는 그 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24위나 되는 분이 순교의 거룩한 피를 흘린 죽산이다.
  병인박해를 전후하여 죽산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죽산 교우촌으로는 고초골, 남풍리(속칭 남굉이), 용촌, 양대리 등이 있다. 죽산 지역 순교자들은 이름은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연구하는 작업은 죽산순교성지의 역사적 의의와 깊이를 더해 줄 것이다. 여러 자료들과 현지답사를 통해 살펴본 죽산순교자들은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보로시나 부부, 여기중, 여정문과 부인, 아들 일가, 문 막달레나, 한치수 프란치스코, 유 베드로, 이희서, 홍천여, 정덕구 야고보, 최성첨과 그의 장남, 이희서와 그의 사위 이진오, 김회장 도미니코, 김인원, 홍치수, 정 토마스, 금 데레사로 모두 24위이다. 
 그 순교의 땅이 오랜 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다가 1994년 강정근(마티아)신부가 죽산성당에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성지 성역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죽산성당은 안성 구포동성당에서 분리돼 나온 성당이다. 죽산성당을 건축한 이는 수원교구 이정운 몬시뇰으로 죽산성당을 무명순교자 성당으로 봉헌하고 죽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성당 한 구석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이 자꾸만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가는 형편이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정근(마티아)신부가 매달 죽산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미사를 이진터 앞, 성원목장 도로변에서 드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여서 먼지와 소음 속에 제대로 된 미사와 강론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음과 먼지 속에서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제대로 묵상 할 수가 없어 강정근(마티아)신부는 이진터를 성지로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하느님께 간구하며 노침초사하였으나 시골 본당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였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신자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황무지에 호박을 심어 팔기도 하고, 신자들 집에서 생산 된 포도를 서울 각 성당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아, 거기서 얻은 수익금으로 성지 개발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교구내 각 성당을 순회하며 성지 개발을 호소, 성지 개발 후원 회원을 모집, 그 성금으로 성지 개발에 필요한 땅을 구입하여 1차적으로 성지 개발을 하게 되었고, 현재의 죽산성지로 성장 한 것이다.

아직도 고통이 모자라(죽산 이진터에서)  <김영수>

땅 기우는 고문도

시원한 바람일 수 있는 것입니까

하늘은 맑고 햇살은 곱습니다

나는 침묵 투명한 땅에서

캄캄히 나의 삶 들여다봅니다

캄캄히 나의 죽음 들여다봅니다

나는 아직도 고통이 모자라

피 맑지 못한 기도는

여전히 구름 뚫지 못하는데

진정 나의 사랑은 어느 높이에서

잠을 깨고 있는 것입니까

멀리 지평선 이루는 숨결

아득히 약속 밝히는 기억

부질없이 떠돌았던 나의 젊음도

이제는 밝은 파문 일으키는

작은 죽음 하나 꿈꿀 때 되었습니라